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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 이희호의 생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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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9836930

    • 저자
    • 발행사항

      대전 :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석사) --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 신학과 교회사 전공 , 2005. 2

    • 발행연도

      2004

    • 작성언어

      한국어

    • 주제어
    • KDC

      230.9911 판사항(4)

    • 발행국(도시)

      대전

    • 형태사항

      62p. ; 26cm.

    •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p. 60-62

    • 소장기관
      •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우편복사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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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서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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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희호는 1922년 9월 21일, 아버지 이용기와 어머니 이순이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졸업생인 의사였고, 6남 2녀의 장녀로 모태 신앙이었던 이희호는 기독교 가정의 분위기에서 신앙으로 자랄 수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기초는 그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936년 이희호는 이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고 감리교 계통의 학교인 이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할 때 '종교상'을 탈 정도로 신앙적인 열심이 있었다. 그리고 여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다닐 때도 성가대를 하는 등 믿음으로 성장하였다. 또 그가 다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기독교계통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기독학생들과 매주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희호는 공부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지만, 이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2년을 쉬었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닐 때는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 조치령'으로 1944년에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뜻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업에 대한 열망은 대단한 것이어서 크로 목사의 도움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크로 목사는 "훈련받은 한국인 한 명은 미국인 선교사 열 명보다 더 많은 일을 합니다. " 하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지역에 있는 감리교 44개 남성클럽에 보내 이희호의 유학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희호는 조국에 대한 무거운 사명감을 갖고 1954년 미국유학을 떠났다. 램버스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카렛 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하나님이 자신을 고난 받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1958년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과 강사로 활동하던 이희호는 대한 YWCA 연합회 총무와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여성 운동 일선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이희호의 여성운동은 기독교정신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희호는 1962년 5월, 주위의 반대를 무릎 쓰고 김대중과 결혼하였다. 당시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는 하였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치규 제법에 묶여 있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은 신·구교의 에큐메니컬적인 결혼이었다.
    김대중의 아내로 산 이희호의 생애는 고난 그 자체였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희호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통하여 민주화운동에 뛰어드는데, 그의 민주화 운동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위한 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이희호는 시련의 참뜻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매일 성경을 저으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힘과 용기를 얻었다.
    3·1 민주구국 선언과 관련하여, 이희호는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행동하며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여러 방법으로 시위를 하고, 구속자들을 위해 목요기도회를 가졌다. 김대중이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 이희호는 경찰의 끈질긴 미행과 감시를 당하였는데, "신앙이 없었다면 인간적인 환멸로 그 칠흑 같은 어둠의 시절을 이겨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이희호 일생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하였다. 1980년 5월 17일 밤 계엄령을 앞두고 김대중은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고 이희호는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내란음모죄로 김대중은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희호는 칠흑 같은 역사의 어둠 속에서 어째서 이 같은 고통이 거듭 되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와 찬송과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때로는 금식을 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면서 신·구약 성경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러면서 자신뿐만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던져진 이 고난의 수수께끼의 해답을 성경을 통해 얻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1981년 1월 23일 무기로 감형되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 어려운 여건에도 이희호는 장년부 교사직을 계속 이어나갔고, 가족기도회를 가지는 등 신앙의 힘으로 이 고난을 이기려 노력하였다.
    1982년 12월 23일, 이희호의 가족은 미국망명길에 올랐다가 1985년 귀국하였고, 김대중은 대선 출마, 낙선, 정계은퇴, 정계복귀 등의 과정을 거쳤다. 김대중은 1997년 대권 도전 4수만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영부인으로서 이희호는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교회생활에서, 이희호는 1990년 당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1991년 2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서대문지방회에서 장로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93년 지방회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된 후에도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이상에서 이희호의 신앙과 활동내용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희호 삶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희호가 행한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모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운동들을 펼쳐나갔다. 이희호의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그의 신앙고백을 삶으로 산 것이다.
    둘째, 이희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의미를 신앙 안에서 발견하였고,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이희호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믿음에 대한 확신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고난에 참여하여 그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희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철저히 알게 되었으며,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를 알게 하였다.
    이처럼 이희호의 인생은 그의 신앙의 연장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의 삶은 기독교신앙의 동기에서 발현된 것이며, 신앙의 힘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지나왔다.
    본 논문에서는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데 그쳤지만, 앞으로는 이희호의 사상에 관한 연구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숨겨진 자료를 잘 찾아내고, 주어진 자료들을 심도 있게 살펴본다면 좋은 꺼리가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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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는 1922년 9월 21일, 아버지 이용기와 어머니 이순이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졸업생인 의사였고, 6남 2녀의 장녀로 모태 신앙이었던 이희호는 기독교 가정의 분위...

    이희호는 1922년 9월 21일, 아버지 이용기와 어머니 이순이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졸업생인 의사였고, 6남 2녀의 장녀로 모태 신앙이었던 이희호는 기독교 가정의 분위기에서 신앙으로 자랄 수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기초는 그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936년 이희호는 이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고 감리교 계통의 학교인 이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할 때 '종교상'을 탈 정도로 신앙적인 열심이 있었다. 그리고 여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다닐 때도 성가대를 하는 등 믿음으로 성장하였다. 또 그가 다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기독교계통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기독학생들과 매주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희호는 공부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지만, 이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2년을 쉬었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닐 때는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 조치령'으로 1944년에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뜻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업에 대한 열망은 대단한 것이어서 크로 목사의 도움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크로 목사는 "훈련받은 한국인 한 명은 미국인 선교사 열 명보다 더 많은 일을 합니다. " 하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지역에 있는 감리교 44개 남성클럽에 보내 이희호의 유학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희호는 조국에 대한 무거운 사명감을 갖고 1954년 미국유학을 떠났다. 램버스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카렛 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하나님이 자신을 고난 받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1958년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과 강사로 활동하던 이희호는 대한 YWCA 연합회 총무와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여성 운동 일선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이희호의 여성운동은 기독교정신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희호는 1962년 5월, 주위의 반대를 무릎 쓰고 김대중과 결혼하였다. 당시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는 하였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치규 제법에 묶여 있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은 신·구교의 에큐메니컬적인 결혼이었다.
    김대중의 아내로 산 이희호의 생애는 고난 그 자체였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희호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통하여 민주화운동에 뛰어드는데, 그의 민주화 운동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위한 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이희호는 시련의 참뜻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매일 성경을 저으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힘과 용기를 얻었다.
    3·1 민주구국 선언과 관련하여, 이희호는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행동하며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여러 방법으로 시위를 하고, 구속자들을 위해 목요기도회를 가졌다. 김대중이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 이희호는 경찰의 끈질긴 미행과 감시를 당하였는데, "신앙이 없었다면 인간적인 환멸로 그 칠흑 같은 어둠의 시절을 이겨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이희호 일생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하였다. 1980년 5월 17일 밤 계엄령을 앞두고 김대중은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고 이희호는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내란음모죄로 김대중은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희호는 칠흑 같은 역사의 어둠 속에서 어째서 이 같은 고통이 거듭 되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와 찬송과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때로는 금식을 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면서 신·구약 성경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러면서 자신뿐만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던져진 이 고난의 수수께끼의 해답을 성경을 통해 얻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1981년 1월 23일 무기로 감형되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 어려운 여건에도 이희호는 장년부 교사직을 계속 이어나갔고, 가족기도회를 가지는 등 신앙의 힘으로 이 고난을 이기려 노력하였다.
    1982년 12월 23일, 이희호의 가족은 미국망명길에 올랐다가 1985년 귀국하였고, 김대중은 대선 출마, 낙선, 정계은퇴, 정계복귀 등의 과정을 거쳤다. 김대중은 1997년 대권 도전 4수만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영부인으로서 이희호는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교회생활에서, 이희호는 1990년 당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1991년 2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서대문지방회에서 장로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93년 지방회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된 후에도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이상에서 이희호의 신앙과 활동내용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희호 삶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희호가 행한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모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운동들을 펼쳐나갔다. 이희호의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그의 신앙고백을 삶으로 산 것이다.
    둘째, 이희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의미를 신앙 안에서 발견하였고,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이희호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믿음에 대한 확신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고난에 참여하여 그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희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철저히 알게 되었으며,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를 알게 하였다.
    이처럼 이희호의 인생은 그의 신앙의 연장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의 삶은 기독교신앙의 동기에서 발현된 것이며, 신앙의 힘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지나왔다.
    본 논문에서는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데 그쳤지만, 앞으로는 이희호의 사상에 관한 연구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숨겨진 자료를 잘 찾아내고, 주어진 자료들을 심도 있게 살펴본다면 좋은 꺼리가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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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목차
    • Ⅰ. 서론 = 1
    • 1. 연구 목적 = 1
    • 2. 연구 자료와 범위 = 2
    • Ⅱ. 학창 시기 = 4
    • 목차
    • Ⅰ. 서론 = 1
    • 1. 연구 목적 = 1
    • 2. 연구 자료와 범위 = 2
    • Ⅱ. 학창 시기 = 4
    • 1. 수업 = 4
    • 2. 신앙생활 = 9
    • Ⅲ. 여성운동 시기 = 14
    • 1. 여성문제연구회 = 15
    • 2. YWCA 연합회 = 19
    • Ⅳ. 김대중 아내로서의 고난 시기 = 25
    • 1. 결혼 = 25
    • 2. 김대중 납치사건 = 29
    • 3. 3·1 민주구국 선언 = 35
    • 4.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 41
    • 5. 미국망명에서 대통령 영부인까지 = 51
    • Ⅴ. 결론 = 57
    • 참고문헌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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