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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이래 만주인의 宗族 형성과 宗族 활동-백두산 권역 만주 宗族을 중심으로

      김준영 중국사학회 2022 중국사연구 Vol.- No.139

      명청시대 宗族史 연구는 지역적으로는 강남 이남, 種族的으로는 漢人에 편중된 연구경향을 보였다. 이에 그간 宗族史 연구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만주인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본래 女真사회는 가샨(gašan, 嘎山)’이라 불리는 地緣에 기초한 향촌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누르하치가 八旗를 조직한 이래 만주사회는 가샨 조직을 八旗의 하부조직인 니루(niru, 牛錄)로 편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샨 하의 혈연집단인 무쿤(mukūn, 穆昆)은 점차 직계혈연 단위의 宗族으로 세분화되었다. 동시에 각 지파 내에 족장을 선발하고 종족을 조직화 하였다. 명청시대 宗族 형성은 혈연집단의 조직화를 의미한다. 청대 만주인도 족보에 나타난 종족 지도자 명칭의 계층화, 족산 설립 및 운용 그리고 향촌사회에 대한 공헌 등 宗族 조직의 다양한 역할을 통해 漢人에 상응하는 宗族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만주인의 족보 편찬, 祭天, 祖塋, 祠堂 설립 등 종족 형성의 表象은 기존 연구에서는 한화의 현상으로만 논의되었다. 따라서 그 운영 과정에 나타난 만주 종족만의 특수성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다. 사실 이러한 종족 형성의 表象은 표면적으로는 한인 종족과 유사하지만, 실제 운영 실태는 팔기제도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고, 그 결과 만주 宗族만의 종족문화를 만들게 되었다.

    • KCI등재

      女眞의 추장에서 滿·漢의 군주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말과 글

      정병진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2 인문과학연구 Vol.- No.75

      본 연구는 17c 초중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주도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말과 글을 통해 그들이 변경의 여진족 추장에서 滿·漢을 아우르는 군주로 변모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사료에 남아있는 그들의 말과 글을 살펴보면 만주인 최고 권력자는 역사 속의 한인 군주가 아닌 정복왕조의 군주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북방민족의정체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들이 정복한 요동 지역의 한인은 새로운 주인으로 떠오른 만주인의 통치를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다만, 명과 후금의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요동의 안정적인 지배와 국가 운영의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소수 한인의 협조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를 위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자신들의 속내를 숨기고 표면적으로 한인에 대한 우대 및 관직을 수여하는 행위를 통해 그들을 한인 지배의 도구로 활용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기에 걸쳐 모두 나타난다. 즉, 만주인 최고 권력자들은 기본적으로 요동 지역의 안정과 만주인을 근간으로 삼는 기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정국의 변화와 그들의 필요성에 의해 한인들에 대한 대우가 변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 KCI등재

      만주인의 흔적 찾아내기

      이영옥 이화사학연구소 2011 이화사학연구 Vol.- No.42

      在韓國, 一些中國史硏究者對滿人和滿語注目, 這是最近幾年的事. 2002年, 滿洲學會創立, 以其會員爲中心關心、硏究滿洲地區和歷史, 但是比較多數學者眞正開始學習滿語、硏究``滿淸史``以及專門機構(高麗大學民族文化硏究院)組織硏究人員還不到五年的時間. 今年, 二月中旬, 筆者發見, 中國史硏究者開始關心的時候, 中文學硏究者當中也有同樣關心來寫論文的. 本稿試圖敍述淸朝皇帝和滿人中華民國時期遇到的變化, 倂且分析描寫滿人生活的文學作品, 有何種意義和界限. 之所以中國史硏究者和中文學硏究者同時關心、硏究同樣主題, 是因爲``滿人認同``對他們提供相逢空間. 過去, 在淸史硏究著作裏, 滿人只不過是被漢人文化及制度吸收的存在. 目前, 一些著作逐漸强調滿人認同和淸朝的內陸亞洲性質. 2007年, 金水珍發表三篇論文, 分析老舍作品, 主張滿人在民國時期還保持認同. 저的硏究, 從中國史硏究者的觀點來說, 有質疑的部分. 首先, 저把一部分滿人所處的狀況看做爲全體滿人的. 中華民國誕生了, 皇帝失去以最高權力者的地位, 但是他一直到1924年在保護地區紫禁城裏受到一定的經濟津貼, 維持淸朝皇帝的名義. 許多滿人成爲中華民國的國民, 卽與漢人同樣地位的一般老百姓. 他們再也不能受到作爲旗人的經濟津貼, 走上下層階層的路. 盡管如此, 滿人的生活不是一槪而論, 而是過去地位決定民國的處境. 其次, 需要嚴密校對歷史事實. 文學硏究能구在硬硬的歷史敍述裏添上軟軟的感性, 有助于歷史硏究. 但是不應該脫離歷史事實. 康熙年間國語騎射倂沒有放松過, 義和團旣有愛國特點又有迷信色彩. 文學作品可以用縮小或誇張事實來吸引一般讀者, 歷史敍述絶代不該脫離事實. 我們雖然有餘地質疑, 而金水珍的試圖有意義的. 滿人寫自己故事的資料不足, 親身經歷民國時期的老舍作品給我們提供看滿人的思想和生活的機會. 參考歷史事實倂分析他的作品, 這對歷史學者, 至少也對我, 使得認眞思考文學作品的歷史性. 淸末民初的大轉換期涌現出許多文學作品, 從歷史學的觀點分析那些作品, 有助于擴大理解當時社會.

    • KCI등재

      대청회전(大淸會典)-명문화된 만주인의 중국지배

      이영옥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0 사총 Vol.71 No.-

      從滿人中國支配的觀點來說, 編纂會典是把滿人釐定爲名付其實的中國支配者的事. 淸初, 編纂會典遲延, 爭取中國的滿人仍然不完全支配中國而已. 現代社會裏, 爭取權力的集團也盡可能想要改變組織與法律, 利于自己的政治志向. 被改變的組織與法律, 在行使權力時, 成爲不可動搖的指針. 誰也容易推測, 滿人以少數支配中國, 脫不了對自己地位的不安感. 淸初, 八旗制具有嚴密組織, 能夠壓倒多數漢人. 但是, 所謂馬上不能治天下, 也不例外于滿人. 他們意識到, 征服以後需要的是制度化了的權力. 淸朝皇帝要確立一種制度, 持續保障滿人一定的地位, 加强支配體制. 他雖然不僅是滿人的皇帝而是所有淸朝成員的皇帝, ‘滿人’皇帝一到‘關鍵’時刻, 依靠得了的就是滿人. 因此, 釐定保障滿人地位是爲了權力的事. 一六六七年, 熊賜利早就建議編纂會典, 過了十七年才開始動手. 會典編纂之前, 滿人參考漢人所作的明會典辦理一些事情. 他們沒有心裏的餘裕編纂大型書籍, 因爲鎭壓三藩之亂, 征伐臺灣抗淸勢力. 征伐完抗淸勢力, 一六八四年康熙帝命令編纂會典, 過了六年時間, 淸朝第一次會典面世.康熙帝在序文裏說, 他爲百姓樹立規範制度, 鑑于過去王朝, 編纂會典. 有人會說, 他以中國皇帝繼承唐朝以來傳統編纂會典. 但是康熙會典, 不與過去王朝的會典不同, 細心照顧淸朝的一部成員卽滿人. 在康熙會典裏, 有關內閣和吏部的規定, 明確地顯示出會典特別關懷滿人. 康熙時代, 在內閣裏, 滿人大學士比漢人大學士少, 但是大學士屬下官員, 滿人比漢人多五倍. 從皇帝的立場來看, 他設想, 一面牽制滿人大學士, 一面把內閣的主導權放在滿人手裏. 吏部也是類似的情況. 吏部尙書, 滿人和漢人各有一人. 但是堂官屬下的司官, 滿人遠遠超過漢人官員. 滿人司官直接受滿人堂官的指揮. 在這種情況之下, 滿人司官不用看漢人侍郞或尙書的臉色。這是滿人小官對漢人大官勉得失去體面的規定. 我們有需要進一步分析的課題. 首先, 全面分析康熙會典. 其次, 比較分析康熙會典和其後會典. 再次, 分析會典則例的內容. 這篇文章多有不足之處, 希望更多硏究彌補其不足.

    • KCI등재

      이기영의 장편소설 <두만강>에 나타난 만주인식

      주기,이해영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5 한국학연구 Vol.- No.79

      본 연구는 이기영의 장편소설 두만강에 재현된 만주 공간의 서사적 특수성을 체계적으로분석하여 조선 근현대 문학사에서 작품의 독특한 의미를 규명하였다. 두만강은 만주를 조선반도와 연관성을 지닌 공간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기존 재만 조선인 문학의 이산(離散)ㆍ실향 서사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간 인식을 제시한다. 작품은 조선반도를 민족 정체성의 근원적 공간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만주를 조선반도의 연장과 항일투쟁의 전략적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는이중적 서사 전략을 구사한다. 이러한 공간 재현은 북한의 공식 혁명사관과 미묘한 긴장 관계를형성한다. 작품은 표면적으로 만주를 혁명 성지로 삼았지만, 서사적 비중을 조선반도 내부 투쟁에 집중하여 공식 역사 서술 내부에 인식론적 균열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두만강은 형식적순응과 실질적 탈구축의 이중 전략을 통해 ‘저항의 공모’의 서사를 구현한다. 김일성 유격대의상징적 등장은 체제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반도 민중의 자생적 투쟁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문학적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본고는 만주 공간에 대한 재현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공식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역사의 다층성을 보존한 텍스트로서 두만강이 한반도 문학사에서 지닌 독창적 가치, 나아가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밝히고자 한다. .

    • KCI등재후보
    • KCI등재

      병합 전후 재조선일본인(在朝鮮日本人)의 만주(滿洲)인식과 만주(滿洲)진출론 -잡지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와 『만한지실업(滿韓之實業)』을 중심으로-

      이현희 ( Hyun Hee Lee ) 연세사학연구회 2016 學林 Vol.37 No.-

      This article attempts to explain perspectives on Manchuria which had initiated within the community of Japanese residents in Korea around the time of 1910’s annexation. Imperial Japan had attempted to extend their influence into the Manchuria, the northern Chinese area, after Meiji Restoration. Japan utilized a victory over the Russo-Japanese War for colonize Korea and strengthened their efforts to invade Manchuria. Meanwhile, Japanese government department in colonial Korea tried many ways to control over Korea and Manchuria. As a result, Japanese merchants who started to immigrate into regions regard Korea as secure market and recognized Manchuria as a new opportunity for expansion After a victory over the Russo-Japanese War. This assersion of “the expansion toward Manchuria” was substantially supported by Japanese residents in Korea. In the Journal Chosen(朝鮮) and Chosenoyobimanshu(朝鮮 及滿洲), we can find Japanese Residents’ visions for Manchuria like Syakuo Syunjo(釋尾 旭邦)’s. They basically recognized Korea and Manchuria as colonies for immigration. Especially Syakuo distinguished Korea’s role as agricultural from Manchuria’s one as industrial. This was to concentrate Japanese capitals on Manchuria, which was deeply related to the perspective of Japanese Resident in Manchuria after annexation. On the other hand, Japanese capitalists and merchants living in Korea largely understood Manchuria from economic perspective. Especially before and after annexation, there emerged more aggressive opinions in Japanese society in Korea advocating for an invasion into Manchuria. Korean and Manchurian Business Association(滿韓實業協會) was a representative group. This group introduced Japanese companies doing business in Manchuria through Mankannozitsugyo(滿韓之實業) and demanded Japanese-centered policies. However,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led by Terauchi Masatake(寺內正毅) was promulgating a corporate law to prevent outflow of capital of Japanese settlers to Manchuria. Finally, Japanese capitalists and merchants also adopt themselves to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s keynote of policy. As a result, two different groups of Japanese Residents seemed to share same perception on Manchuria. But this tendency was a passing phenomenon. If the Japanese resident’s community in Korea had grown and been divided by their interests, there was a strong likelihood that a variety of perceptions on Manchuria made an appea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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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錫英의 間島認識과 “可居”地 探索 - 「遼左紀行」을 중심으로

      정영구 중국사학회 2024 중국사연구 Vol.- No.149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의 정치·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간도(間島)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지리적, 문화적인 동질성으로 인해 많은 韓人이 간도로의 이주를 선택했는데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주요 이유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장석영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간도로 답사를 떠났지만, 그가 간도에서 본 상황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많이 달랐다. 1912년, 간도는 증가하는 이주자들로 인해 더 이상 낙토가 아니었다. 1913년이 되면 간도는 더 이상 낙토가 아니라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장석영의 간도답사의 목적은 가거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이주한 유학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이주 목표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 유인석은 고국과 가깝고 독립운동에 바로 참여할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 만약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의 것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곳을 원했습니다. 이상룡은 독립운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을 원했다. 장석영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독립보다 유교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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