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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사의 주체와 타자: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에서 나타나는 스페인 음악의 타자화를 중심으로
이은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 2022 이화음악논집 Vol.26 No.1
이 글은 음악사의 행위 주체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소위 ‘서양’ 음악사라고 불리는 학문에서 연구대상이자 역사적 행위 주체인 ‘서양’은 어떻게 정의되고 선별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서양음악사 교과서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는 그 라우트(Donald J. Grout)의 『서양음악사』를 분석대상으로 하여, 중세 초기 부터 역사서술에 등장하면서도 끊임없이 타자로서 재현되는 스페인을 중심 으로 서양음악사 서술에서 나타나는 타자화의 기제에 대해 고찰하였다. 『서양음악사』에서 스페인 음악은 서양음악의 역사가 형성되기 시작한 가 장 초기부터 그 일원으로 포함되어 있지만, 곧바로 주변화되고 타자화되었 다. 특히 『서양음악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10-11세기는 스페인 이 아랍의 영향을 받던 시기와 일치하며, 스페인이 『서양음악사』에 다시 등 장하는 13세기는 아라곤 왕조가 아랍 왕조를 몰아내고 이베리아를 재정복 한 시기였다. 또한 본격적인 ‘유럽’의 일원으로 재등장한 것은, 무어인과 유 대인을 스페인에서 몰아내고 유럽 최고의 경제 대국이자 식민제국으로 부 상한 1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음악사 서술에서 스페인 음 악은 유럽의 일원이기보다는 식민지인 ‘신세계’로 ‘유럽’을 전파한 존재로 서만 그려진다. 17세기 이후 스페인 음악은 『서양음악사』에서 더 이상 ‘유 럽’의 음악으로 서술되지 않고, ‘유럽’의 타자로서 재현된다. 이를 강화한 것은 19세기에 정점을 맞게 되는 유럽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으로, 이 담론 적 전략 안에서 스페인은 서양이 아닌 동양에 가까운 타자로 그려진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타자이던 ‘유럽’은, 음악사 서술의 주체로 자 리 잡기 위해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타자를 만들어내었다. 스페인은 ‘유 럽’과 동일한 기독교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언제나 아랍과 연관되어 인식됨 으로써 ‘유럽’이 타자화하기에 가장 가깝고 손쉬운 대상이었다. 이 글에서 는 이러한 타자화를 통해 ‘유럽’이 ‘서양’ 음악사의 주체가 되었음을 밝히고 자 했다.
서양어 문헌 목록으로 살펴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한국에 관한 지식의 생산ㆍ축적 현황
배민재(Bae, Min-jae) 한국사학회 2021 史學硏究 Vol.- No.141
본 연구에서는 서양어 문헌 목록에 수록된 한국 관련 저술을 바탕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한국 관련 서양어 저술의 생산ㆍ축적에서 나타난 변화들을 추적하였다. 19세기 후반은 한국과 서양의 접촉이 본격화된 시기였던 만큼, 한국에 관한 다양한 서양어 저술이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개항기 서양인의 한국 인식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약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개항 이후에 출간된 한국 관련 서양어 저술이나, 재한 서양인의 정기간행물들이 그동안 많은 연구자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그러한 활동과 그 결과물이 한국에 관한 지식의 지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해당 시기 지식이 생산, 유통되는 방식과는 또 어떠한 관련이 있었는지는 조명되지 못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19세기 후반의 정치ㆍ사회적 변동을 계기적으로 인식하되 접촉 지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한국에 관한 지식이 생산되는 구체적인 맥락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서양어 문헌목록을 토대로 한국 관련 저술이 생산ㆍ축적되어온 흐름을 파악,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지식 생산의 주체가 현지 사회와 접촉하는 밀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지식 분화의 양상도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해당 시기 한국에 관한 서양의 지식이 어떠한 근거와 맥락 속에서 생산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 추후 장기지속적인 흐름에서 그 변화를 추적하는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This study tracked changes in the production and accumulation of Korean-related western writings since the late 19th century, based on the bibliographical works on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various western writings on Korea started to get published, as the contact between Korea and the West began in earnest. It was after more than half a century that Korean researchers began to pay attention to the western perceptions of Korea during the opening period. Although many studies have been showed interest in western literature on Korea that was produced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it was not revealed what role those writings have played in the western knowledge on Korea and how the knowledge was produced or distributed at the time. This study tries to examine the specific context in which knowledge about Korea was produced, noting that the political and social changes in the late 19th century were recognized instrumentally, but that contact areas were formed. Based on several bibliography lists, this study identifies the trend of western knowledge of Korea, and also explains the changes in density of the producing agents and Korean society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The main purpose is to reveal the basis and context of western knowledge of Korea at the time, and use it as a starting point for research to track changes in the long-term continuous flow.
서양 지식의 전달을 위한 번역의 시작과 그 양상 ―난학(蘭学)의 번역 사정을 중심으로―
홍성준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19 일본학연구 Vol.57 No.-
This article is about how translation was done in the process of incorporating Western studies in Japan, and in the case of Western medicine being introduced to Japan among “Rangaku” that collectively referred to Western studies at that time. The need for translation increased while interacting with Western civilization in the 16th century, and trained translators who are negotiators in charge of interpretation and translation. They needed a language ability to understand their language while interacting with the West, but this included not only language ability to communicate, but also the ability to read Western originals and gain knowledge and information among them It was a thing. Therefore, translators at that time was required for conversation and writing, as well as translation and reading skills. In the early modern period many books of Western studies were influx. In order to incorporate Western ideas and techniques through this, it was essential to translate not only the interpreters that Western and Japanese people can interact with each other well, but also the introductory books. Rangaku was more positively accepted by the influence of the Tokugawa Shogunate’s isolation policy of not incorporating Western literature except the Netherlands. The translated words devised during this period will play a major role in spreading Western knowledge widely to Japanese society. This demonstrates that without translation, the transmission of foreign knowledge is also limited. In other words, translation can be said to be an important means in the transmission and acceptance of foreign cultures and knowledge. 이 글은 일본에서 서양의 학문이 전달되는 과정에 있어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당시 서양의 학문을 총칭하여 불렀던 ‘난학’ 중에서도 서양 의학이 일본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번역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고찰한 글이다. 16세기에 서양문명과 접촉하면서 번역의 필요성이 증대되었고 교섭 실무자인 통사를 양성하여 그들을 학습하고 통역과 번역 실무를 맡겼다. 서양과 교류를 하면서 서양의 언어를 이해하는 언어 능력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어학 능력뿐만 아니라 서양의 원서를 읽고 그 속에서 지식과 정보를 얻는 능력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통사들은 회화와 작문을 비롯하여 번역과 독해 능력까지 요구받았었다. 근세기에 많은 서양 학문 서적들이 유입되었고, 이를 통해 서양의 사상이나 기술 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서양인과 일본인들이 원만하게 교류하기 위한 통역뿐만 아니라 유입된 서적의 번역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난학은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더욱 활발하게 수용되었다. 이 시기에 고안된 번역어는 서양 지식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번역어가 없이는 외국 지식의 전달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즉, 번역은 외국의 문화와 지식의 전달과 수용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김상민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0 동국사학 Vol.49 No.-
본 연구는 서양문헌에 나타난 한국의 이미지와 인식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변화되고 왜곡되었으며 정형화 되었는지를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다. 대항해시대 이래 서양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서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중국의 조공국"으로 오랜 기간 알려져 왔으며,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은둔의 나라로 여겨졌다. 즉 한국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한 서양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주의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인식은 서양인들의 한국방문이 크게 증가하면서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한반도에 대하여 연구하고 방문했던 서양인들은 한국의 폐쇄성이 정부의 쇄국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며 사실 한국인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친절하며 온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서양인들은 한글과 같이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서양인들의 방문을 환대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하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은 오랜 기간 서양에 알려진 한국인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당시의 문헌들에 제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한국의 대외정책은 변화했지만, 서양에서는 여전히 한국을 은둔과 미개의 나라로서 인식했던 것이다. 개항 이후 서양인들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한반도를 방문했지만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이 서양의 아류라 여긴 일본에 의해 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전근대적 사회구조, 남존여비, 양반들의 기생적 성향에 대한 서양인들의 서술은 비록 당시 한국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전의 왜곡된 자료를 보충해 그 내용을 더욱 악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서 이용되었다. 많은 서양인들이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서 일본을 인식했던 것에 반하여, 한국의 독자성을 발견했던 서양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한국인들만의 문화적, 사회적 독창성을 인간성, 종교, 풍습, 의례 등 여러 분야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은둔의 한국", "고요한 아침의 나라", "미지의 세계"라는 한국의 이미지는 사실보다는 이미지이며 표상에 가까웠다. 한국에 대한 인식과 편견 그리고 도덕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한국과 한국문화의 왜곡, 정형화, 그리고 확대재생산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와 질서를 바라보던 서
서양문헌에 나타난 한국 - 정형화된 이미지와 사실의 간극 -
김상민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0 동국사학 Vol.49 No.-
The object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various perceptions on Korea as reflected on Western publications. By observing and analyzing various western books published, the author traces how these images and the perceptions on Korea had been changed, distorted and spread. Since the age of discovery, history and culture of Korea were accessible by westerners only through China and Japan. Geopolitically extremely isolated in the Far East, Korea had been known to be the untouchable and unveiled hermit nation to the west with no one really understanding what Korea was. For a long time, the records of Hendrik Hamel and Du Halde might be the only resources that could be seen as correct representations of Korea in the west. Including these, most of western publications described Korea as “a tributary state” and “a Hermit Nation.”, and the west had these two perceptions on Korea. At the age of imperialism, the perceptions on Korea in the west had been changed due to the increased western visitors. The westerners who studied and visited the Korean peninsula realized that Korea seemed secluded because of its seclusive national policies and as a matter of fact the people were very open, kind, and gentle. Some westerners could discover the uniqueness of Korean culture such as native Han-gul. The understanding of Korea and its people had gradually changed from the previous periods. However, this new perception was not reflected well in western publications at that time. Although Korea had changed its policies and become more often to the west after 1882, the west continued to recognize Korea as a hermit and primitive state. Many missionaries and scientists visited Korea and brought their cultures with them. They believed that western civilization and Christian belief were much superior to the counterparts of the east, and should be main momentums for modernization of Korea. While they did not understand that distinctiveness and uniqueness of the Korean culture, they believed that Korea had to be reformed and civilized by superior powers such as the West or at least Japan, an epigone of the west. There were very few westerners who did understand the uniqueness of Korean society. While most of westerners regarded Japan as the modernization model for Korea, they did not show any willingness to discover the uniqueness of Koreans in various fields. In conclusion, the perceptions such as “Hermit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 “Unknown world” did not reflect real facts, but just simplifies signs. 본 연구는 서양문헌에 나타난 한국의 이미지와 인식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변화되고 왜곡되었으며 정형화 되었는지를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다. 대항해시대 이래 서양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서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중국의 조공국”으로 오랜 기간 알려져 왔으며,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은둔의 나라로 여겨졌다. 즉 한국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한 서양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주의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인식은 서양인들의 한국방문이 크게 증가하면서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한반도에 대하여 연구하고 방문했던 서양인들은 한국의 폐쇄성이 정부의 쇄국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며 사실 한국인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친절하며 온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서양인들은 한글과 같이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서양인들의 방문을 환대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하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은 오랜 기간 서양에 알려진 한국인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당시의 문헌들에 제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한국의 대외정책은 변화했지만, 서양에서는 여전히 한국을 은둔과 미개의 나라로서 인식했던 것이다. 개항 이후 서양인들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한반도를 방문했지만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이 서양의 아류라 여긴 일본에 의해 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전근대적 사회구조, 남존여비, 양반들의 기생적 성향에 대한 서양인들의 서술은 비록 당시 한국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전의 왜곡된 자료를 보충해 그 내용을 더욱 악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서 이용되었다. 많은 서양인들이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서 일본을 인식했던 것에 반하여, 한국의 독자성을 발견했던 서양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한국인들만의 문화적, 사회적 독창성을 인간성, 종교, 풍습, 의례 등 여러 분야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은둔의 한국”, “고요한 아침의 나라”, “미지의 세계”라는 한국의 이미지는 사실보다는 이미지이며 표상에 가까웠다. 한국에 대한 인식과 편견 그리고 도덕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한국과 한국문화의 왜곡, 정형화, 그리고 확대재생산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와 질서를 바라보던 서양인들의 세계관의 축소모형이었다.
김영주 동양사회사상학회 2001 사회사상과 문화 Vol.4 No.-
많은 사람들이 '서양과 동양의 차이' 를 화두로 삼아 사색하고 연구해 왔다. 필자는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이라는 논제들 내세워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차이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분법二分法과 음양법陰陽法은 서유럽 지역과 동아시아 지역의 다름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고틀이다.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차이가 거의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한 '총체적 집결점'이요 그 '시발점'이라고 본다. 서양의 이분법과 동양의 음양법이 모두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함께 지니고 있다. 서양 이분법에는 '엄격한 순결성'이라는 좋은 면과 '독선적 맹신' 이라는 나쁜 면이 있다고 보며, 동양 음양법에는 '상대적 다양성'이라는 좋은 면과 '애매한 무분별'이라는 나쁜 면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이 "서로 이질적인 듯 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고, 서로 보완적인 듯 하면서도 서로 이질적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서양 문화의 좋은 면에 일방적으로 몰입되어 있으며, 서양 학문 특히 서양 학문의 방법론에서는 좋은 면만 이야기하며, 아예 고정 관념으로 박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한 번쯤 뒤집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아, 서양 이분법의 좋은 면보다는 일부러 '나쁜 면'을 주로 드러내어 논의하려고 한다. 여기에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동양 음양법을 논의함에도 일부러 나쁜 면을 주로 드러내기로 한다 이렇게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비판을 문제 의식으로 삼아, 그 대안으로 필자가 '태극 이분법'이라는 새로운 사고틀의 씨앗을 제시해 보겠다(동양의 '陰陽의 待對流行을 담는 '태극' 그리고 서양의 '善惡의 대립'을 담는 '이분법'이라는 낱말을,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 보완한다'는 '상호견제와 상호침투'의 뜻을 담아 '태극 이분법'이라고 이름지어 보았다.
박이문(Ynhui Park)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11 아시아리뷰 Vol.1 No.2
3세기 전부터 근대 과학 기술 문명이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흐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흐름은 서양의 영향이 동북아시아로 미치고 있음을 뜻하고, 문명의 중심이 서양에 있음을 뜻한다. 문명의 이러한 판도는 유럽인들에 의한 근대적 의미의 과학적 지식 양식과 기술 능력의 개발에서 찾을 수 있다. 앎은 곧 힘이며, 서양이 개발한 과학이라는 앎의 양식은 가장 큰 실천적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과의 접촉으로 잠을 깬 동북아시아는 타의적으로나 자의적으로 지난 두 세기, 아니면 한 세기에 걸쳐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흡수하는데 열중했고, 21세기 초반인 오늘날 우리 모두는 서구의 선진국들과 상대해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세계 문명의 중심은 역전되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역전되어 가는 문명의 흐름에 대해서 서양은 자기 연민과 허탈감에, 동양은 자화자찬과 오만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생각과 태도는 모두 잘못이다. 지구가 하나의 세계라면 모두가 가까이 살 수밖에 없고, 또한 인류는 환경 오염, 핵전쟁, 생태계 파괴, 지구 온난화, 기아 등 문명의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문명사적 위기의 원인은 서양이 발명하고 이제는 동양이 기꺼이 추종한 과학 기술의 필연적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 기술 문명을 거부하고, 그런 문명의 틀을 만든 서양 문명을 거부하고 동양의 전통적 문명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과학적 사유와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어떤 인간 사회, 어떤 개인도 생존할 수 없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잘못된 활용이며 그 잘못은 서양의 잘못된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있다. 오늘날의 문명사적 문제는 서양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동양의 생태친화적 세계관으로 대체하여 그 테두리 안에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활용할 때 해결될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동/서 문명의 우/열, 과학의 내재적 선/악을 따지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인류 문명의 지속적 발전을 위하여 소승적이 아니라 대승적 관점, 즉 동양인/서양인의 구별을 초월한 인류의 관점에서 위기에 처한 문명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For the past two or three centuries, the West has been the center of dominant power in the world, subsuming the rest of the world―such as the East and North Asia under its power. The role of advanced scientific knowledge and technology has been extremely crucial in this formation of hierarchical relationship. However, the center of the world has been visibly shifting from the West to the Far East during the recent decades, with the rise of East Asia as the new technological power. As this turn of the situation signifies for East Asia the recovery of its lost pride, the West has received it with fear and fright as a threat to its power, interpreting it as a sign of the decline of, or even the death of, the Western civilization.However, both attitudes are unconstructive. Instead, both parties of the East and the West should be willing to help each other and be thankful for what one owes to the other. Today, the overuse of technology has brought about problems such as ecological, environmental, so socio-political crises, all of which threaten the human civilization as a whole. It is now time for the West and the East to confront these global problems and cooperate together to resolve them, beyond competing for power as in the sense of superior-inferior relationship of the past civilization.
오지석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회 2023 기독교사회윤리 Vol.55 No.-
이 연구는 선행연구에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서양예절의 수용을 서양 예법서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이 연구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존 프라이어(John Fryer, 傅蘭雅) 선교사의 "서례슈지"(西禮須知)와 유학생 출신 유동작(柳東作)의 "교제신례"와 이철주 편의 "서례편고"를 중심으로 문헌적 연구를토대로 근대전환기의 서양 예절의 수용과 서양인들과의 교류 양상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로 이 연구는 서양인에 의한 서양 예법의 소개와 교육, 한국인의 적극적수용 그리고 서양과의 교제(교류)를 위한 변용이라는 문화의 메타모포시스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acceptance pattern of Western etiquette by examining Western etiquette books to see if they specifically affected our lives. Specifically, this study looked at the Western etiquette and exchange patterns of Western etiquette during the modern transition period based on John Fryer’s missionary “Seorye Shuji” owned by Soongsil University’s Korean Christian Museum, Yoo Dong-jak’s “Gyoje Shinrye” and Lee Chul-joo’s “Seorye Pyeongo”. As a result, this study reveals the pattern of the metamorphosis of culture: introduction and education of Western etiquette by Westerners, active acceptance by Koreans, and transformation for socializing (exchange) with the West.
신현승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교육연구소 2020 대학교양교육연구 Vol.5 No.1
19세기 후반의 조선, 20세기 초엽의 근대 한국에 있어서 대다수 지식인층의 학문적 배경에는 뿌리 깊은 유교적 전통이 남아있었다. 이로 인해 근대 한국에서의 초기 서양철학 연구도 유교적 지식과 언어를 통해 서양철학을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근대 한국 최초의 서양철학 연구자라 할 수 있는 이정직과 이인재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 두 사람은 유교적 소양의 토대 위에서 서양철학을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서양철학 연구는 본격화된다.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은 1910년 이후 1920-1930년대에 걸쳐 서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럽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식민지 상황 하에서도 국내에서의 서양철학 연구가 본격적 궤도에 오른다. 또 1930년대는 철학연구회가 결성되고 哲學이라는 최초의 철학 학술잡지까지 창간되면서 국내에서의 서양철학 연구는 더욱 활성화된다. 따라서 이 논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간략한 사항을 전제에 놓고 근대기 한국에서의 서양철학의 수용과 전개 양상에 관해 통시적 시각에서 개괄하고 고찰하였다. 본문의 첫째 장에서는 철학이라는 용어의 번역과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동아시아 전통 학문으로서의 유교적 요소에 관한 탐구를 진행하였다. 그 후 철학이라는 용어가 근대 한국 사회에 전파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이어서 서양철학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혹은 서양철학 연구의 선구자로서 이정직과 이인재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본문의 둘째 장에서는 서양철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1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이전까지(좁게는 1930년대)의 한국에서의 서양철학 연구의 전개 양상에 대해 검토하였다. 또한 당시 서양철학을 배우기 위해 유럽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인물들에 대해 고찰하고, 그들의 인생과 언론에서의 평가 및 서양철학 연구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등등에 관하여 분석하였다. 이어서 1920년대 후반의 경성제대 철학과의 의의와 졸업생의 면면 등을 포함하여 국내에서의 서양철학 연구현황을 고찰하였다.
신대철 한국국악학회 2005 한국음악연구 Vol.38 No.-
한국ㆍ중국ㆍ일본의 문화적ㆍ음악적 관련은 서양음악을 받아들여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19세기 에 서양음악이 삼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이전 서양음악은 중국, 일본, 한국의 순으로 소개되었다. 그러 나 그 수용은 일본, 중국, 한국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즉, 일본에서는 1890년대 이전. 중국에서는 1910년대 와 1920년대 무렵, 한국에서는 1920년대 이후에 서양음악이 수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 중 한국에서의 서양음악 수용 시기가 가장 늦었지만, 서양음악의 수용 기간은 가장 짧았다. 삼국은 주로 교회음악, 특히 개신교의 음악, 그리고 서양식 군악을 통해서 서양음악을 받아들였다. 이 중 개신교의 찬송가는 삼국의 창가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정규 학교교육에 도입된 창가는 삼국의 서양 음악 수용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렇게 삼국의 서양음악 수용과정은 그 모습이 서로 유사하였으나, 이 과정 에서 일본은 두 나라와 달리 전통음악인을 참여시키면서 그들의 군국주의 건설을 위해 군악을 통해 서양음 악을 수용하려고 두 나라보다 국가적으로 보다 더 큰 노력을 쏟았다. I have studied the process of adopting the Western music in Korea, China, and Japan in this paper. The aim and results of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Korea, China, and Japan have had a lot of cultural similarities in several respects since the antiquity. The music of these three countries has had some similarities as well. In that case, how these three countries imported and adopted the Western music? Can the similarities be found in the process of adopting the Western music by these three countries? The Western music had been introduced to China, Japan, and Korea in order before its full-scale flowing into the three countries in the 19th Century. But the adoption of the Western music was realized in Japan, China, and Korea in order.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adoption of the Western music was realized in Japan in 1890s, in China around 1910s and 1920s, and in Korea after 1920s. Of the three countries, though the Western music was lastly introduced in Korea, the period of adopting it in Korea was the shortest. The three countries imported the Western music mainly through church music, especially through Protestant music, and the Western military band music. Of these, the hymn of Protestant contributed much to establishing Changga(song created in the three countries in Western style under the influence of Protestant hymn), later the Changga had been introduced in the regular school education, and it contributed much to the adoption of the Western music in the three countries as well. The process of adopting the Western music in these three countries had some similarities as such. But Japan forced their traditional musicians to participate in the process of adopting the Western music and made more every possible national effort to adopt the Western music through military band music than other two countries for their militaristic purpose. These two efforts made by Japan were differences between the three coun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