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중국사 연구에서 엥겔스의 민족관습법 이론 응용

        이위쥔 중국사학회 2014 중국사연구 Vol.93 No.-

        민족관습법은 각 민족이 오랜 생산활동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형성된 해당 민족의 관습법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럽 민족관습법의 역사와 특징을 분석하여, 피통치민족의 관습법이 장구하게 보류될 수 있거나 철저하게 소멸되는 것은 생산방식과 민족 조직방식이 훼손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엥겔스가 말한대로 ‘법’의 기초는 ‘의지’가 아니라 사회물질생활이며, 곧 “상호제약적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이다. 민족관습법 방면의 엥겔스의 이론적 성과는 중국 역사연구에도 중요한 교훈적 의의를 지닌다. 1. 엥겔스가 논한 유럽 역사상의 민족관습법엥겔스는 자신의 저작『고대법』과『독일이데올로기』에서 법”의 기초는 어느 사회집단(일련의 개인은 더더욱 아니다)의 “의지”이며, 그것은 사회물질생활, “상호제약적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때문에 민족관습법을 생산하는 물질생활 기초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 민족관습법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민족관습법의 완강한 생명력에 대하여, 엥겔스는『게르만인의 고대역사』에서 상세하게 분석했다. 먼저 그는 고대 게르만인들의 민족관습법이 로마법과 만나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완강하게 천년 이상 보류된 사실을 서술했다. 충돌의 근원은, 한편으로는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인의 재산분배제도가 저촉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인들의 관습법의 법률 절차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게르만의 실제 통치자 바루스는 로마총독의 최고사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무력으로도 게르만인들이 자신들의 생산조직 형식과 맞지 않는 로마법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없었다. 민족관습법은 민족조직 형식과 생산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약 그 원래의 촌락조직, 혹 민족(혹은 씨족) 조직이 보존되어있기만 하면 민족관습법은 정복자의 법률과 맞서며 장기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새로운 통치자가 폭력을 동원해 당지 주민의 생산.생활조직형식(가령 씨족)을 파괴하고, 아울러 무기와 입법 수단에 의지해 새로운 법률을 추진할 때 민족관습법은 비로서 잔재만 남거나, 혹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2. 중국 역사상 민족관습법이 제정법과 조우한 후의 귀결점엥겔스의 민족관습법 이론은 중국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지도적(指導的) 의의가 있고, 동시에 중국 역사는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엥겔스가 유럽의 역사를 논술할 때 “민족관습법”은 모두 피정복민족에게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정복민족의 법률(가령 로마법)은 그것에 상응하여 국가제정법이 되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누가 통치 지위에 있든지 간에, 중원왕조의 법률은 언제나 국가제정법으로 표현되고, 소수민족의 법률은 그에 따라 민족관습법이 되었다. 이런 인식의 기초 위에서, 후자를 다시 설명하겠다. 유럽 민족관습법의 최후의 귀결은, 혹자는 장구하게 보류되고, 혹자는 부분적으로 남거나 심지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의 민족관습법은 거의 대부분 하나의 상황으로 귀결되었는데, 곧 우선은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연후에 최종적으로 제정법 속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요· 금 왕조가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요. 금 정권 초기에 소수민족 관습법과 중원왕조 법률은 언제나 처음에는 병존하다가 후에는 차츰 융합되는 추세를 보였다. 첫째, 건국 초기에 요와 금은 모두 한인 거주 지역에는 단독으로 한법을 실행하였는데, 곧 소위 ‘民族分治’이다. 요 태조는 건국 초부터 거란관습법의 성문법으로의 轉化를 촉진하였다(定制契丹及諸夷之法, 漢人則斷以律令)”. 요 태종 때에는“國制로 거란인을 다스리고 漢制로 한인을 다스리라”고 규정하였다. 사법 심리 방면에서는 南北二院의 분치정책을 실행하였다. 금 태조는 건국 초기, 법제상에서 주로 여진관습법을 채용하였다. 천보(天輔)2년 금 태조는 “國書와 詔令은 마땅히 屬文에 능한 자를 뽑아서 맡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여 마치 성문법 제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듯하다. 제3대 황제인 희종은 천권(天眷)3년(1140) 하남 등지를 공격하여 취한 후, 당지에 “형법은 모두 율문(즉 중원의 한법)을 따른다(“刑法皆從律文”)”고 선포하고, 이후 여진관습법을 강제하지 않았다. 둘째, 중원 한법은 농경문명에 적용되었기에 유목과 수렵 등의 생산방식에 기반한 거란과 여진 민족관습법보다 선진적이었다. 때문에 요와 금의 통치자들은 모두 주동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한법을 흡수하였다. 요대 건국 초기의 정책은 民族分治였고, 태종시대부터 차츰 漢制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는데, 가령 “발해인은 한법에 의거해 통치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거란인으로서 漢官을 받은 자는 漢儀를 따르고. 한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 제6대 황제 성종 즉위 이후, 전문적으로 율령(당시의 율령이라는 것은 당, 송의 율령을 가리킨다)을 번역하게 하여 요대 법률의 한화 과정이 시작되었고, “거란인과 한인이 서로 때려 죽음에 이르면, 그 법의 [적용]輕重은 균등하지 않다”와 같은 법은 폐지되었다. 제8대 황제 시기에는『重熙條制』를 修訂하도록 명을 내려, 중원 한법 율문인『咸雍重修條制』를 많이 흡수하고 실제로 이것을 적용하였다. 금조는 皇統 연간에 “본조의 舊制로써 수당의 제도를 겸하고 요송의 법을 참조하여 성문법전인『皇統制』를 편찬하였다. 이후『續降制書』.『大定重修制條』.『泰和律義』이 편찬되었다. 원대인 脫脫은『泰和律義』가 “실은 당율이다”라고 여겼다. 이때부터, 금조의 법제는 형식에서 내용가지 전면적인 漢化를 실현하였다. 요금의 민족관습법이 제정법을 만난 이후 병존하다가 이후 융합된 것을 설명하는 사료는 매우 많지만 여기서는 상세하게 논하지 않겠다. 3. 엥겔스의 이론으로 중국 역사를 연구할 때 나타나는 특징중국 역사상 중원에 입거하게 된 소수민족 관습법의 귀결은 대부분 “因俗而治”의 법제 방침 아래에서 우선은 중원왕조의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후자에 융합되어 갔다. 이는 비록 유럽의 상황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엥겔스가 밝혀낸 역사 규율에 부합된다. 왜냐하면 중원에 진입한 소수민족은 모두 농경문명을 받아들여 신속하게 봉건화 되고, 생산과 생활조직 형식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관습법의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因俗而治”는 중국 봉건왕조의 일관된 정책이고, 심지어 중화문화의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禮記. 王制』에서 “中國 戎夷五方의 백성은 모두 본성이 있어서 [강제로 바꾸도록] 推移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때문에 강역 내의 다양한 민족의 상황에 근거해 자신들의 풍속을 따르도록 하고 다양한 정치제도를 실행하였다. 秦昭王 시기 “巴郡랑中夷人” 과 맹약을 맺을 때, “秦이 夷를 범하면 黃龍 한쌍을 보내고, 夷가 秦을 범하면 淸酒 一鍾을 보낸다”고 했다. 한제국은 군현이 설치된 소수민족 지역에 “천자의 법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당지의 舊俗으로 통치했다. 수당왕조도 소수민족에 대하여 “추장을 나누어 설치하고 각각 그 부락을 통치하도록 한다”, “자신들의 풍속으로 다르스게 한다”는 민족정책을 취하였다. 요대의 南北面官制度, 서하와 금대에는 藩漢 官制가 있었다. 원.명.청 시기에는 이 방면에서 더욱 제도화. 법규화가 진행되었다. 역대 봉건왕조의 법치정책이 일맥상통하게 중화문화의 兼容하고 품는 특징과 개방적인 기개를 체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상에서 “大一統”의 전제 하에서 법률형식도 매우 다양했다. 중국 역사상의 국가제정법과 민족관습법이 병존하다가 융합되는 특징은 중화민족 다민족통일 융합이라는 필연적 역사 추세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유럽 내부에서는 많은 안정적 민족공동체가 있지만 통일되는 추세는 없다. 그런데 중국다민족통일 융합에는 필연성이 있다. 첫째는 지리환경적 원인, 둘째는 생산방식적 원인, 셋째는 중원문화의 개방적 성격이다. 요컨대, 엥겔스가 밝혀낸 민족관습법은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방식이 보류되는 기초 위에서 보류될 수 있는 역사규율은 중국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중원농경문명의 선진성 및 중원문화의 개방적 특징은 소수민족이 중원지역에 진입한 뒤에 대부분 주동적으로 중원문명을 받아들이고, 통치 지위에 있든 없든, 그들의 민족관습법은 항상 중원왕조의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융합되었다”. 이는 중국다민족통일과 융합의 필연적 역사추세와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 KCI등재

        北魏의 律令 수용과 그 실상

        최진열 중국고중세사학회 2015 중국고중세사연구 Vol.37 No.-

        ≪魏書≫卷111≪刑罰志≫記錄了在‘序紀時代’拓跋部的法律在: “昭成建國二年: 當死者, 聽其家獻金馬以贖; 犯大逆者, 親族男女無少長皆斬; 男女不以禮交皆死; 民相殺者, 聽與死家馬牛四十九頭, 及送葬器物以平之; 無繫訊連逮之坐; 盜官物, 一備五, 私則備十. 法令明白, 百姓晏然.” 什翼犍(昭成帝)統治的拓跋部法律跟別的遊牧民或者遊牧國家一樣, 是遊牧民的慣習法保留了復讎法和X倍倍償. 這是跟中國的律令, 特別是中國的刑罰不一樣, 比較拓跋部建國二年的刑罰跟前漢呂太后二年的張家山漢簡≪二年律令≫和唐代, 對中國人適用的肉刑, 勞役刑, 笞․杖․徒․流․死等多种多样刑罰跟對鮮卑等遊牧民適用的對殺人罪的物的賠償代贖, 對偷盗或者强盜的X倍倍償不一樣. 所以, 北魏建國以後北魏皇帝們把中國的律令不可能實施鮮卑,烏桓,匈奴,丁零等多种多样的遊牧民或者騎馬民. 在北魏前期可汗(相當于中國的皇帝),可敦(相當于中國的皇后),直勤(可汗氏族男性稱號),胡族的官制,胡族的軍鎭和護軍,俸祿制的未實施是制度方面不實施律令的證據. 在孝文帝時期馮太后和孝文帝把胡族的政治制度改變了中國的律令和法律, 可是反映遊牧,牧畜,日常生活的遊牧民特有慣習法不可能代替反映農耕生活的中國刑律, 所以拓跋部的不文慣習法或者中國的成文法律,卽律令不可能田賦胡人(鮮卑,烏桓,匈奴,丁零等多种多样的遊牧民或者騎馬民)和漢人(中國人). 北魏後期胡人官吏們按照中國刑律被處罰, 所以孝文帝以後對胡人支配層適用中國式律令, 可是住在六鎭和平城一帶的胡人們保持了胡俗, 可能是循遊牧民固有的慣習法. 除了北魏以外, 遼,金,元等其他異民族王朝都使用二元的法律體系, 比如說≪遼史≫卷61≪刑法志≫上, “乃詔大臣定治契丹及諸夷之法, 漢人則斷以律令, 仍置鐘院以達民寃.” 因爲北魏的狀況跟其他異民族王朝一樣, 支配了遊牧民和農耕民, 所以北魏也可能運用二元的法律體系, 可是≪魏書≫沒有記錄關于這個狀況. 除了拓跋鮮卑人以外, 特別是漢人(中國人),西域人,阿拉伯人,非洲人,土耳其系遊牧民,高句麗人也住在北魏後期都城洛陽. 北魏後期洛陽的人口, 在≪洛陽伽藍記≫卷5≪城北≫ “京師東西二十里, 南北十五里, 戶十萬九千餘.” 同書卷3≪城南≫宣陽門條說: “東夷來附者處扶桑館, 賜宅慕化里. 西夷來附者處崦嵫館, 賜宅慕義里. 自葱嶺已西, 至於大秦, 百國千城, 莫不歡附, 商胡販客, 日奔塞下, 所謂盡天地之區已. 樂中國土風, 因而宅者, 不可勝數. 是以附化之民, 萬有餘家.” “萬有餘家”是住在洛陽的西域人, 占了洛陽戶口的9%. 包括其他非漢族或者外國人, 住在洛陽的非漢族占了11.9. 至少北魏政府在‘國際城市’洛陽不可能適用對經驗自己的法律體系的漢人和非漢族一元的中國式律令體系. ≪唐律疏議≫卷6≪名例≫化外人相犯條, “諸化外人, 同類自相犯者, 各依本俗法, 異類相犯者, 以法律論.” 這可能是至少適用北魏後期‘國際都市’洛陽的.

      • KCI등재

        서양인(西洋人)들의 근대(近代) 중국(中國) 아편문제(鴉片問題)에 대한 인식(認識) -『만국공보(萬國公報)』와 Chinese Recorder의 내용을 중심으로-

        노재식 중국사학회 2011 중국사연구 Vol.74 No.-

        鴉片問題是中國近代嚴重的社會問題之一. 來華傳敎士爲了維護傳敎利益, 從一開始就對鴉片吸食和鴉片貿易堅持反對的態度. 尤其是1860年代以後, 基督敎在中國有了大的發展空間, 來華傳敎士的數量也上升. 中國鴉片泛濫的狀況引起了進入中國內地傳敎士的關注. 於是, 他們利用創辦各種刊物作爲手段, 對中國鴉片問題進行了猛烈的批評. 其中, 中文報刊『萬國公報』和英文期刊『敎務雜志』(Chinese Recorder)刊載了大量反對鴉片問題的文章, 對中國鴉片問題的原因、嚴重危害的情況、勸戒煙的方法等問題給予了深刻深討. 『萬國公報』是宣傳禁煙方面的影響最大的刊物. 『萬國公報』原名『中國敎會新報』, 1868年9月由美國傳敎士林樂知創辦於上海, 1874年改名爲『萬國公報』, 1889年由英美傳敎士在華基督敎組織-廣學會接辦. 『萬國公報』是一빈新聞報道、中外時事評論、中西學介紹與硏究的綜合性的期刊. 該刊在華的40餘年裏, 在宣傳基督敎敎義同時, 也對促進中西文化的交流做了一些工作. 『萬國公報』自創刊起就對鴉片問題予以關注, 進入1870年代以後, 鴉片問題成爲『萬國公報』所關注的重要問題之一. 『萬國公報』和『敎務雜志』登載的鴉片文章充分認識到鴉片在華流毒的危害性, 所以對吸食鴉片人提出了進行批判. 타們認爲鴉片不僅是醉人的奢侈品, 還是有害的毒品. 鴉片會傷害身體、敗壞道德和社會. 同時, 『萬國公報』和『敎務雜志』認爲基督敎在中國難以傳播, 是鴉片貿易的緣故. 中國人向來就憎惡西方人, 因爲被西方國家打敗, 還被强制輸入, 看到那些基督敎國家, 就對基督敎흔反感. 因此, 『萬國公報』和『敎務雜志』上極力宣傳反對鴉片貿易. 同時, 還介紹鴉片禁止的方法. 『萬國公報』和『敎務雜志』的反鴉片言論不僅表明了傳敎士對鴉片問題的基本態度, 對廣大華人信徒甚至對基督敎有흔大反感的中國人都産生了重要的影響, 而且19世紀末由傳敎士占主導的禁煙活動的開展, 打開了堅實的輿論基礎. 『萬國公報』和『敎務雜志』是較有影響的綜合性刊物, 對近代中國反鴉片運動發揮了一定的作用, 但也存在著明顯的局限性. 타們在宣傳反鴉片的同時, 鼓吹基督敎敎義, 還强調上帝制造萬物, 宣揚基督敎的救世敎義. 這兩빈期刊上登載的反對鴉片和鴉片貿易的文章的最終目的仍是基督敎在華的傳播.

      • KCI등재

        近代 中國 博物學의 民族主義的 性格 – 旣存 硏究의 批判的 檢討를 中心으로

        정택성 중국사학회 2024 중국사연구 Vol.- No.150

        근대 중국 사회에서 서양 박물학의 도입과 발전은 처음부터 중국 민족주의의 발흥과 맞물려 있었다. 근대 중국 박물학에 관한 기존의 많은 연구는 민족주의의 편향적이거나 단일한 서사에 국한되어 있고 일부 연구에서는 바람직한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본고는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의 배경 속에서 근대 중국 박물학의 발전 맥락을 살펴보았고, 근대 중국 박물학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였다. 먼저 ‘민족 위기 극복’이라는 근대 중국의 콘텍스트에서 서양 박물학은 실업 진흥과 민지 향상을 위한 실용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진화론 사상의 탑재로서 자강과 구국 담론에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구성’은 민족 위기 극복이라는 거시적 담론에서 일반화된 서사로 치부하기보다 그 중층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첫째, 박물학의 이용 목적에 있어 지역마다 시기마다 아젠다마다 그 실용성의 구체적 내용이 다양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둘째, 박물학의 이용 효과에 있어 공리주의의 작용으로 인해 박물학 지식의 생산과 보급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했음도 주목된다. 셋째, 이용 방식에 있어 박물학은 과확으로서의 자율성에 의거해 어떻게 자원 확보를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거나, 민족주의와 과학전문가주의 등 과학자 개인 성향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중요한 대목이다. 다음으로 근대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 명물학과 서양 박물학의 관계를 처리해야 했는데, 청 말기의 전통적 사대부들은 서양 박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에도 그것을 중국 명물학과 접목시켜 중국 전통 문화의 우월성을 드러낸 반면, 중화민국 시기의 박물자와 신문화운동의 문학가들은 중국 명물학 전통을 살리자는 레토릭을 활용해 근대적 박물학의 보급과 사회 윤리의 구축을 추진하고 나아가 중국만의 박물학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대부분 연구의 ‘전통·근대’, ‘국학·서학’의 이분법적 구도와 조화론적 서술을 극복하기 위해 근대 중국 박물학자들의 취사선택, 재해석과 재정립의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적 민족주의와 과학적 모더니티 사이의 대화와 충돌의 기제와 양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박물학 연구를 통해 근대 중국의 과학 민족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였다. 하나는 지역성이 강한 본토 물종에 대한 연구와 확보는 자연물과 과학자, 민중, 국가 사이의 물질적 연계를 형성시키며 국가의 경계, 국가 주권, 민족 자결권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키고 민족 아이덴티티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근대 중국 박물학자들은 본토 물종을 연구할 때 제국주의에 대해 민족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국제 협력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과학 민족주의와 과학 국제주의를 조율하면서 모순적 감정을 겪게 되고 이 과정에서 민족 아이덴티티를 모색하게 되었다. 박물학 연구 대상인 자연물의 물질적 지역성과 보편성은 근대 중국 박물학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라 보여진다.

      • KCI등재

        전통 중국인 핵심 가치관의 함의 -曲阜碑刻文獻의 시각에서

        노칙권 중국사학회 2014 중국사연구 Vol.93 No.-

        曲阜는 孔子의 고향으로서 여러 역대 帝王·賢臣·名士들이 존숭·배알하였으며, 아울러 수많은 碑刻을 남겨놓았다. 그 역사적 폭은 前漢에서 民國 시기에 이르며, 내용도 배알한 공적을 기록하거나 崇學 등을 서사하였다. 이러한 碑文은 전통 중국인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기록하였으며, 초월적 가치의 정신 신앙을 지니고 있다. 역사의식의 관점에서 이러한 碑文을 고찰해 보면, 우리는 “天人合一”이 전통 中國人 歷史理論의 출발점으로, 그 핵심 가치관의 초석임을 발견할 수 있다. 孔子는 天命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는 일찍이 “死生有命,富貴在天”·“獲罪於天,無所禱也”·“畏天命” 등을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天命”은 알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고, 이 때문에 “五十而知天命”이라고 말했는데, “知天命”의 주체는 분명 인간 그 자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以德配天” 사상을 한걸음 더 발전시켜 人事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아아! 舜이여! 하늘의 차례(曆數)가 그대 몸에 있도다. 진실로 그 中을 잡아라. 사해가 곤궁하면 천록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舜이 “진실로 그 中을 잡도록(允執其中)” 人事에 최선을 다해야 天命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처럼 天命의 신비적 색채는 점차 약화되었다. 孔子는 君子가 부단히 “修己”하여야만 “知命”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우고 위에 다다른다. 나를 알아주는 것은 저 하늘뿐이구나!”라고 하여, 인간 자신이 “德”을 수양하는 데서 “命”을 알고 실현할 수 있다는 사상을 말해 후세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또한 “天人合一”의 신앙 아래에서만 曲阜碑文 가운데 자주 보이는 “稽古”라는 말의 함의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 “稽古”는 결코 “복古”와 같지 않은데, 이러한 碑文의 대부분은 孔子와 관련되어 있어서 孔子에게 제사할 때 전통 중국인은 쉽사리 孔子의 古今觀과 서로 연관시켰다. 孔子의 古今觀은 복古가 아니다. 우리는 孔子가 말한 “周는 두 시대(夏와 商)를 본받아 찬란하구나, 그 문화(文)여! 나는 周를 르겠다.”라는 문구 속에서 복古의 함의를 읽어내기 매우 어렵다. 이 문구는 단지 공자가 春秋末期라는 시점에 서서, “文”의 기준을 “夏·商·周” 3代 중에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周를 따르겠다.”는 말이 孔子가 “복古”를 주장한 증거로 될 수 없다. “稽古”는 孔子가 3代 및 그 이전의 문화 전통에 대한 계승을 중시했음을 증명할 뿐이다. 孔子는 한편으론 전통을 중시했지만, “시기에 따른 제도의 확립”에도 중점을 두었다. 孔子가 부모를 위해 분묘를 쓸 때 이러한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修德”은 “天”“人”관계를 잇는 연결 고리로,전통 중국인이 가진 핵심가치관의 본질이다. “德”은 중화민족의 일관된 정신 추구이다. “德”字의 출현은 매우 일러서, 어떤 학자들은 商代 시기에 이미 출현했다고 본다. 예컨대 徐中舒 編著의 『甲骨文字典』·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著의『甲骨文編』에는 모두 “德”字를 수록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 “德”관념이 반드시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즉 周武王이 商을 격파하면서 周나라 사람들은 “天命無常”을 깊이 느꼈고, 德사상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周代의 “德”문화는 윤리학과 도덕철학의 범주를 초보적으로 확립하였던 것이다. 春秋戰國 시기가 되면,儒家는 德의 함의를 道德修養 쪽으로 한층 발전시켜, 德으로써 修身할 것을 더욱 강조하였다. 孔子는 처음으로 德과 인간 자신 수양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이후 儒學은 孔子의 德論思想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결국,德은 중국 고대 철학의 중요한 범주로서 중화민족의 정신적 지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曲阜碑刻文獻 가운데 “內在修德”에 대한 중시는 역대 중국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孔子의 德性에 대한 推重과 德性 교육에 대한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 修德은 실천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뿐만 아니라 孔子의 후손과 儒家를 기준으로 한 많은 관리들이 그 德性에 관한 공훈 및 업적 덕분에, 다른 사람에 의해 碑가 세워지고 칭송받았다. 德性文化는 무엇에 근거해 전통 중국인들에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바꾸어 말해 핵심 가치관의 동력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바로 儒家에서 강조하는 “道統”傳承이다. 碑文을 보면, 儒家 道統 의식의 기원은 매우 이르다. 漢代의 『建寧二年史晨前後碑』중에는 이미 이러한 의식이 있다. 魏晉 時期『黃初年間魯孔子廟之碑』에는 魏文帝가 議郞 공선(孔羨)을 책봉해 魯縣의 百戶 宗聖侯로 삼는 일을 기재하였는데, 이는 초기의 道統 傳承이 혈통에 기반을 두고 실현된 것임을 보여준다. 역대 왕조는 공자의 후손을 봉하였는데 이는 일견 문화전통에 대한 국가의 중시를 보여주기 위함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공자의 후손들이 공자의 혈통과 道統을 널리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공자 사상을 실천하는 하나의 모범을 수립하길 희망한 점이다. 唐朝 시기에는 후세의 道統觀이 점차 명확하게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宋代에는『太平興國八年重修연州文宣王廟碑銘』에서 道統과 正統의 변론이 그 당시 주목받는 命題였음을 반영해냈다.『康熙二十五年闕裏至聖先師孔子廟碑』에는 康熙 23년 孔子廟를 배알한 일을 기재하여,康熙가 “政統”·“道統”의 합일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孔子시기를 원점으로 하여 우리는 그 전 시기에 堯·舜·禹·湯·文·武·周公을 되돌아 볼 수 있었고, 그 후 시기에 孟子·董仲舒·朱熹과 王陽明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역사에서 역사로 나아가는 道統은 (시간을) 초월하여 변치 않는 특색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소위 “濟古維來”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儒家 학설의 대표성과 전승은 중화민족이 점차 형성한 공통의 사상문화 체계로 孔·孟의 이론에 그치지 않으며, 단순히 그들로 대표되는 儒學 일파만의 사상도 아니다. 요컨대 전통 중국인의 핵심 가치관은 이러한 역사적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즉 전통 중국인이 “天一合一”을 숭상하고, “內在修德”에 집중하며, “道統傳承”을 존중한 것은 유구한 중화민족에 대한 정신적 지표로서 전통 중국인의 문화 혈통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이러한 사상 관념은 우리에게 여전히 적극 귀감이 되는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 KCI등재

        The Middle Kingdom (中國總論)에 나타난 사무엘 윌리암스의 중국관(中國觀) -청조(淸朝)의 쇄국정책, 사회상의 내용을 중심으로-

        로재식 중국사학회 2019 中國史硏究 Vol.0 No.120

        衛三畏(1812-1884)是早期來華美國新敎傳敎士,從1883年10月抵達廣州,直到1876年返美,凡43年,是當時在華時日最長的西方人. 衛三畏在華期間,不僅努力從事文化傳敎,而且積極參與美國遠東外交活動,長期擔任美國駐華使團飜譯,曾9次代理美國駐華公使,同時他一生致力與硏究和介紹中國傳統文化,寫作了不少漢學著作. 其中,『中國總論, The middle Kingdom』 成爲他作爲美國漢學第一的地位. 『中國總論』包括中國地理、言語、文學、社會、宗敎、歷史、文化以及對外關係等諸方面內容,其對美國漢學的發展影響很大. 本論文主要探討在『中國總論』的內容中,衛三畏對淸朝實行閉關政策原因和一些社會狀的看法. 衛三畏認爲, 淸朝實行閉關狀態, 阻碍了基督敎福音的傳播, 是與上帝的意旨相違背的. 他堅信, 中國最終將走向開方. 在他看來,一方面,開方本身對中國是有益的,中國人通過開放可以獲得更高的目標、更多的知識和希望. 衛三畏將中國人的生活狀態看成是停滯的. 在他看來,中國就是落後、停滯的代名詞,而西方國家則代表着先進與進步. 中國發展的最終目標就是西方的現在. 他對當時中國社會的一些列現象-如科學技術的落後、女性的居纏足、住環境的不衛生以及人性的墮落等問題-作出了客觀的論述. 他作了深刻的分析,而且其論述有一定的價値. 不過它以基督敎敎義判斷中國社會現象,中國貧困的原因歸結與不信基督敎信仰,這一點是難勉片面的看法.作爲傳敎士,衛三畏的思想可以理解的,但一些論述過與强調了基督敎的作用. 總之,衛三畏在《中國總論》中對中國文化進行了比較系統的分析,雖然其中不免帶有片面性和西方傳敎士對中國固有的偏見,但對中國文明持肯定態度,譽其爲“最文明的異敎國家”. 他的漢學著作成爲美國中國學的釐正碑,還他對東學西漸的貢獻不可忽視的.

      •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의 방향

        朴正鉉 중국근현대사학회 2004 중국현대사연구 Vol.20 No.-

        中日兩國對甲午戰爭持有截然相反的理解, 其評價也, 隨着兩國的歷史展開過程, 出現過完全不同的情況。因此, 韓中日三國對甲午戰爭的認識不容易達到比較合理的結論, 最好我們首先槪括各個國家如何理解甲午戰爭, 然後再比較分析其認識。 韓國不但是個甲午戰爭的直接受害國, 而且其領土成爲戰場。진管如此, 韓國歷史學界硏究타與東學農民戰爭的關係, 更重視因戰爭的結果所進行的甲午改革。甲午戰爭暴發時, 韓國不能堅持自我主張, 只不過근着中日兩國的利害關係接受타們的要求而已。韓國學界仍然重視東學農民戰爭與甲午改革, 這種傾向, 不是正確反映當時的歷史現實, 而是他們有强調近代性的目的。 就日本而言, 在甲午戰爭得勝, 此後, 在走上帝國主義道路起了決定性作用。日本經過甲午戰爭, 成爲亞洲唯一達到近代化國家, 還達到可與西方國家競爭的地位。因此, 日本不太重視甲午戰爭本身內在的性質, 反而主張他們不可避面地參與戰爭。與此同時, 日本主要提起甲午戰爭暴發的原因, 卽나個國家發動戰爭, 試圖擺脫戰爭的責任。 在評價同一事件甲午戰爭, 韓國强調近代化的連續性, 日本理解爲近代化的契機, 中國解釋爲近代化的危機, 這些評價不同引起認識不同。這些認識明確說明, 韓中日三國還不能擺脫以自國爲中心的歷史認識。繼着, 探討中國對甲午戰爭認識。 흘今爲止, 中國對甲午戰爭的視角基本上未有흔大的變化, 但是按時情出現過稍微的差別。甲午戰爭一般被定爲圍繞朝鮮的宗主權, 淸日兩國所發動的侵略戰爭。這種性質可以看出于馬關條約第一款“朝鮮爲完全自主國”。淸日兩國全然不考慮朝鮮的主權, 發動侵掠朝鮮的戰爭。日本開始侵略大陸後, 就中國而言, 戰爭的性質變成衛護國家的。中國主要强調日本的侵掠, 相當忽視戰爭的本質。可見, 中國對甲午戰爭的歷史認識明顯顯示出以自國爲中心的思考。換句話說,中國的歷史認識仍然不擺脫侵掠與反侵掠或加害國日本與受害國中國的邏輯。 中國歷史學界强烈批評, 甲午戰爭前後帝國主義列强恐後爭先地侵掠大陸。不過, 一九八零年代以來, 逐漸少重視周圍國家的立場。甲午戰爭的最大受害國雖然是朝鮮。中國的歷史敍述不提起淸朝對朝鮮的宗主權所包含的不合理性, 或對朝鮮的帝國主義性侵掠, 只不過敍述朝鮮的要請或隣國朝鮮而已。在此, 需要說明的是, 從形式上看, 帝國主義國家侵略中國, 根据于條約或契約。因此, 中國學界應當明確揭露近代條約的不當性, 細心分析中國統治體制的矛盾, 但是他們却反復主張中國是西方列强侵掠的最大受害國。 中國對甲午戰爭的歷史認識之所以强調日本侵略性, 是因爲當時中國不能구克服民族危機, 使得他們感到自愧。幷且, 在中國, 意識形態還束縛學術, 不能自由發表見解, 也不能擺脫‘愛國主義’的立場。與這些學界的情況相反, 歷史敎育却出現重視市民敎育與個人的趨勢, 但是爲了變化旣存歷史認識, 還需要一定的時間。

      • KCI등재

        채원배의 북경대학 개혁 ( 1 ) - ' 겸용병포 (兼容倂包) ' 와 신구논전 (新舊論戰) 을 중심으로

        김정화(Jung Hwa Kim) 중국사학회 2000 중국사연구 Vol.8 No.-

        蔡元培相信了敎育眞正的價値. 他在敎育救國立場上答應了腐朽的北大校長. 當時中國, 企圖强化國權啓發民智. 使人民具備淸雅品德. 這就是通過敎育能到達. 從開始高等敎育. 國外只小規模辦的留法勤工儉學無法救廣大中國. 通過大學培養人才能改革中國, 再派這些人到全中國去要敎育人民. 蔡元培在北大就職談話中, 向學生提出 “抱定宗旨”. “砥礪德行”. “敬愛師友”盡力給學生提供學術環境. 最首先課題是必須招聘有學問的敎授. 他認爲所謂大學, 應組成所有的思想和學派 “낭括大典, 網羅衆家.” 因而. 選拔敎員采取了兼容幷包方針. 這樣原則上. 陳獨秀·李大釗·魯迅·胡適·錢玄同·劉半農·高一涵·沈尹默等被招爲敎員, 他們都是『新靑年』主編. 因此, 北大自然被成爲新文化運動搖籃. 與此同時. 蔡元培招納有高學問而思想方面上堅持保守的一些人. 就是高鴻銘·劉師培·黃侃. 以垂下변髮支持復벽的高鴻銘與發起籌安會的劉師培爲領袖形成了北大保守派. 蔡元培認爲講話有道理, 主張有理致. 可以展開自己思想, 還使學生可以自由選擇. 根據兼容幷包與思想自由, 北大從蔡元培之後日益組成新學術環境, 激烈地論戰主義主張. 活潑了學生思想. 蔡元培采取民主和自由學風不但使新文化運動發展起來, 還大力强化『新靑年』編輯力量以後其作用也大幅提高了. 這明確地說明北大成爲新文化運動中心. 那是與蔡元培提唱新文化運動有密接地關系. 北大改革當中, 特別新文學者和舊文學者大擧被聘文科. 以文科新知識人爲中心提唱文學革命. 其結果使新文化運動得到有力地位. 以『新靑年』爲團結更多的新知識人, 擴大了改革範圍向學生吸收新思潮和政治活動機會. 可是. 北大從此激烈地遇到舊派挑戰. 以林서爲領袖舊勢力고賴軍閥政府卦崇拜孔子的牌子打擊了蔡元培和新知識人. 蔡元培表示贊同新知識人又參加了他們的論戰. 他基本上不反對舊文化和舊文學. 他明確表示這樣的立場. 然而, 林서不是代表個人, 而是代言了對新文化運動的舊勢力的嫌惡. 由于以蔡元培支持新文化運動, 北大雖被衆矢之的, 反而其結果是使新文化運動得到更快發展. 北大改革是在五四運動史上産生深刻的意義. 他采取兼容幷包方針在主觀上反映折衷主義以及中庸的道理. 可是在客觀上能看得見新文化運動之中做出了極大的作用. 蔡元培的立場與陳獨秀和新文化運動那些人不同. 他反對儒家派只是中國因兩天多年堅持孔子學術, 而産生在政治和文化及敎育上造成흔大弊病. 文學革命仍是那樣, 革命目的是要改革文學形式和內容. 蔡元培認爲中國文言文相近拉丁文字, 拉丁語已成爲過去的東西. 他主張白話最主要是在實用方面. 他認爲目前隨着科學發展需要其他學問, 文字也要求普遍化. 學問逐漸多樣化和文化範圍亦擴大了, 那能有餘閑學舊文字?而此將舊文字즘樣表達現代人的思想和言語?他提出以白話代替文言文, 這是必然的趨勢. 他支持白話, 而不是全面地排斥文言文, 主張在美術文和一些學術方面上要使用文言文. 蔡元培認爲不矛盾中國傳統文化與西方文化. 他總是以西方自由·平等 ·博愛當作中國仁·誓·義的同樣內容. 蔡元培從小有系統地學過經學, 他在思想方面影響到深刻的儒家學術. 外國留學時期, 他雖學了西方文化 , 却是自覺地堅持立場擁護中國文化. 他在深淵依然有着對中國傳統文化的驕傲. 這是他一生當中一向不變的.

      • KCI등재

        근대(近代) 중국(中國)의 지식계(知識界)와 고홍명(辜鴻銘)의 문화(文化) 보수주의(保守主義) -고홍명(辜鴻銘) 사상(思想)의 형성(形成) 과정(過程)과 특징(特徵)을 중심(中心)으로-

        김수영 중국사학회 2017 중국사연구 Vol.106 No.-

        在近代中國的建設過程中, 特別是鴉片戰爭后西方文明?快地傳入中國的情況下, 中國傳統文化履行着?樣的作用, 是中國知識界需要解決核心問題中的一個. 圍繞這個問題, 當時中國知識界出現了激烈的矛盾, 始與辛亥革命后一群知識分子徹底拒絶傳統文化幷且要求全面接受西方文明. 這些知識分子主張新文化運動, 要對中國社會發揮急速的影響力. 與之對抗的則是呼?傳統文化价値知識人的陣營, 近代中國知識界以“傳統”的作用爲中心明確地分裂開來. 這樣的知識界分裂體現爲從1920年代的`東西文化論爭`到1930年代的`中國本位文化建設論爭`事實上這恰好貫通了中華民國的歷史. 中華民國知識界保持明確的戰線以傳統文化論爭爲中心的理由是, 在同等時期?銜接着自由主義和社會主義尖銳的政治矛盾. 不管是?樣的理由圍繞着`傳統`與`近代中國的建設`問題而展開知識界的對立, 是中華民國期間顯露出最尖銳的事實. 但這樣的對立幷不僅限于中華民國時期, 中華民國之前卽從鴉片戰爭以后開始, 到淸朝末期也是圍繞接受西方文化和傳統文化价値的問題, ?成爲了劃分淸朝知識界的主要指標. 淸末時期的政治勢力洋務派, 變法派, 革命派的知識分子在建設自己理念基礎的時候`傳統文化`常常是重要核心部分內容. 不管??說這是近代中國知識界要完成的作業, 卽近代中國的建設過程中究竟?樣理解“傳統”的意義和作用, 這樣的問題好像依然也持續出現在中華人民共和國的歷史當中. 細看1960年代的文化大革命和1990年代人文精神論爭的話, `傳統文化的地位`依然是將知識界分爲兩部分的論点. 通過觀察近代中國知識界形成的過程中對“傳統”作用的獨特思考方式, 我希望本論文最終能讓我們以新的視角去理解今天的中國. 本論文主要集中傾聽近代中國史上維護傳統文化价値的代表, 文化保守主義家其中之一辜??的主張. 當時文化保守主義陣營里淸流派, 國粹主義, 東方文華派, 學衡派, 論語派等多樣的名稱一樣, 他們之間意見上也存有?大的差異. 他們都是以重視傳統文化作用爲出發点建設近代國家, 但是對于“傳統”具體的机能與內容却有着不同的意見. 本論文在這些衆多文化保守主義學家當中選擇了辜??先生, 主要采取他的主張. 擁有國際聲譽的辜??, 給近代中國知識界的影響, 是他不愿意發揮那樣的影響力, 還是中國知識分子不愿意?, 影響微乎其微. 辜??他國際上的聲譽和他在國內的威望差距?大的根本原因是什??? 到底辜??他向西方的知識分子傳達了什?樣的信息? 爲什?中國知識分子對辜??的見解沒有和歐洲人一樣的反應? 在建設近代國家與傳統文化的作用面前辜??和中國其他的文化保守主義者們的差異究竟在?里? 雖然在當時的中國知識分子那里沒能受到關心, 但是在當時西方知識分子中受到了?熱切的關心, 我認爲通過這種反差現象看出辜??的思想或許超越了近代中國知識界的思想界限.

      • KCI등재

        중화민국시기 상해의 교역 네트웍과 물류

        이병인 ( Lee Byeong In ) 중국사학회 2004 중국사연구 Vol.28 No.-

        中華民國時期 上海是中國經濟對內外交涉窓口, 上海占中國整體貿易的40%以上, 國內物資的約40%通過上海流轉. 上海的主要對外貿易國是歐美國家(上海對外貿易70%以上), 其中 英國, 美國, 德國等是最重要的貿易??伴. 日本也是, 占上海進出口貿易的15%, 東南亞貿易在上海貿易當中所占比例雖少 但也有其特色. 就是通過華僑進行進口和出口. 上海主要通過沿海港口把國內物資移入和移出. 長江流域的大都市, 華北ㆍ華南的大都市都和上海結成貿易關系. 世界的經濟動向和貨物通過上海輸送到通商港口, 由此傳達到隣近小都市, 再由小都市把貨物賣到隣近農村. 中國的貨物經過逆反過程移出, 中華民國時期 中國的經濟通過上海的交易網進行統合, 其交流的核心在于沿海都市間的物資交流. 因此 中國的開港結成了與傳統的物資流通載然不同的貿易網. 隨之都市的盛衰也不同. 雖然掌握進出口的人是西洋商人. 國內的物資交流依然是通過中國式的方式和傳統的流通渠道進行. 號家, 行家把洋行進口的貨物轉賣到商店. 結算方式是利用與傳統錢庄有着密切聯系的庄票. 賣買時主要是通過鄕親進行交易, 鄕親之間互相幇助和結成團體. 同業公會干預其交易, 海外貿易雖然增加, 但在國內連接, 變更, 維持流通網的依然是中國的商人買賣方式. 卽中國把傳統的商人買賣和習慣以數量上擴大的方式對應世界經濟的沖擊. 從貨物的流動來判斷. 雖然中華民國時期 中國始終展現出作爲歐美各國及日本制成品市場和原料供應地的形象, 但中國各地域和貿易國家的不同也呈現出不同的特色. 上海主要從西歐進口機器. 出口農産品, 上海從日本進口機器, 也大量進口棉織品. 作爲上海近代工業的龍頭一棉紡織工業, 在爭??中國市場上和日本處于競爭關系. 相反, 于東南亞和國內貿易當中, 上海反過來販賣工業産品, 購入各地域的地方特産. 綜合以上來看, 可以明確看出; 上海在輕工業部分代替進口品. 把國內及東南亞作爲舞台正在成爲經濟中心. 上海處在把先進國工業制品-上海-中國內地及其??海外港口璉接的中間地帶, 或連接中國內地和世界經濟. 或與西歐和日本競爭. 上海形成了連接中心部和周邊部的維系秩序的一??軸心.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